RI3650 지구소개

Rotary International District 3650

한국로타리, 3650지구 100년 이야기 (8)

 

장학문화재단출범, 장학생 7만여 명 배출

당시 전국 3개지구 구심점 된 첫 단일사업

 

글. 지구사료위원장 신흥래 (서울새신라RC, 소설가)

 

한국 로타리는 1961년 375지구 단일지구로 승격 출범한 후 1969년 7월 1일 376지구(부산⸱경남북⸱제주)가 분구되고, 뒤이어 1971년 7월 1일 377지구(전남북)가 창립됨으로써 3개 지구 시대를 열었다.

 

이와 같이 1970년 전후로 지구가 나뉘게 된 것은 이 시기에 클럽과 회원 수가 현저하게 늘어났음을 의미했다. 즉, 1968년부터 1971년까지 3년간 전국 클럽에 입회한 회원이 2,400여 명에 달했다. 이후 1976년 4월에는 전국 162개 클럽, 5,568명으로 성장하여 로타리안 5천 명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 12월에는 185개 클럽에 회원 수가 6,870명으로 늘어났다.

 

□ 지구별 클럽 및 회원 현황 (1977. 12. 15. 기준)

지 구

클 럽 수

회 원 수

365지구(서울⸱경기⸱충남북⸱강원)

78개 클럽

3,061명

366지구(부산⸱경남북⸱제주)

54개 클럽

2,256명

367지구(전남북)

53개 클럽

1,553명

 

185개 클럽

6,870

 

전국 3개 지구가 공동 참여하는 장학사업 추진

 

전국적으로 로타리클럽이 신설되고 회원이 확대되는 가운데 한국로타리 전체 회원이 참여하는 단일사업으로서 장학재단을 세우자는 의견이 발의되었다.

 

1970년 10월 17일, 375지구(365지구) 제10년차 지구대회에서 춘천로타리클럽의 최정헌(춘천RC) 회원은 몇몇 지도자의 의견을 규합해 장학재단 설립 안건을 제안했고, 참석자 전원의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최정헌(崔正憲) 회장은 후에 375지구 제14대 총재(1974-75년)를 지낸 인물이다.

 

이듬해 1971년 10월 9일, 서울 타워호텔에서 375지구(총재 李容卨, 서울RC) 제11년차 지구대회 겸 377지구(총재 朴東福, 광주RC) 제1년차 지구대회가 합동지구대회로 열렸다. 이날 박동규 375지구 직전총재가 전년도에 발의된 장학재단 설립 결의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설립발기인 지명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상정하였고, 이 역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아울러 부산⸱경남북⸱제주도 지역을 통할하는 376지구 박정관(朴正寬, 남부산RC) 총재가 이 결의에 뜻을 같이함으로써 한국 로타리 3개 지구 전체가 참여하는 장학사업이 본격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재단설립의 기초를 다졌던 16인의 발기인으로 활동한 회원은 다음과 같다.

박동규 조동수 오선환 황희찬 이용설 박정관 박동복 엄규진 신태범 최정헌 김종호 박선규 안성수 서진하 곽용훈 신태호

 

발기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갖은 끝에 1971년 11월 25일 정관 및 세칙을 확정하고 임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1973년 2월 26일 문교부(오늘의 교육부와 문화체육부 업무를 관장함)의 인가를 받아 한국로타리장학문화재단이 공식 창립하게 되었다.

 

발기인회를 이끌고 초대 이사장에 선임된 박동규(朴東奎, 1916~1985) 직전총재는 한양로타리클럽 소속으로서 1970-71년 제10대 375지구 총재를 역임한 인물이다.

 

초대(1972-76)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이사 11명, 감사 2명)

□ 이사장: 박동규(전 375지구 총재)

□ 이사:

황희찬(서울RC, 전 375지구 총재) 김영소(부산RC, 전 RI이사)

조동수(서울RC, 전 375지구 총재) 이용설(서울RC, 전 375지구 총재)

이병호(남서울RC, 전 375지구 총재) 최정헌(춘천RC, 전 375지구 총재)

박정관(남부산RC, 전 376지구 총재) 임영식(동부산RC, 전 376지구 총재)

박동복(광주RC, 전 377지구 총재) 곽용훈(김제RC, 전 377지구 총재)

□ 감사:

오선환(남서울RC, 전 375지구 총재) 김종인(대구RC, 전 375지구 총재)

조동수(서울RC, 전 375지구 총재) 이영춘(군산RC, 전 377지구 총재)

 

1973년 한국로타리 장학문화재단의 역사적 출범

 

정관에 명시된 재단의 설립 목적은 “로타리 정신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과 문화사업의 조성”이다. 재단에 장학기금을 출연하는 회원을 ‘봉사의 인’으로 명명하고, 1구좌를 10만원으로 책정하였다.

재단은 기금 조성에 캠페인을 위해 3월 29일이 있는 주간을 ‘한국로타리 장학문화재단 주간’으로 지정하고 클럽들은 이 주간에 회원들에게 장학사업의 취지를 알리고 기금 출연에 참여하도록 권장하였다. 3월 29일을 모금 주간으로 한 것은 1940년 국제로타리에서 탈퇴했던 서울로타리클럽이 해방 후 국제로타리의 승인을 받아 재창립한 날을 기념한 것이었다. 각 클럽은 이 주간에 열리는 주회에서 회원들에게 ‘커피 한 잔, 담배 한 갑을 아껴 장학기금을 출연하자’며 모금운동을 펼쳤다.

가장 먼저 기금을 낸 것은 375지구였다. 375지구는 지구대회 결의로 1970-71년 결산 잔여금 530,059원 전액을 재단에 기부함으로써 기금 조성의 물꼬를 텄다. 이를 기점으로 장학재단 설립안을 발의했던 최정헌 회원이 10만원을 기부하여 ‘봉사의 인’ 제1호 회원이 되었다. 뒤를 이어 김기택(한양RC) 회원이 제2호 기부자가 되었다. 또한, 같은 클럽의 김인득 회원은 거금 100만원을 성금하여 ‘봉사의 인’ 제3호가 됨과 동시에 최초의 ‘개인장학기금 기부자’로 이름을 올렸다.

박동규 이사장은 자신의 수필집 『민들레의 집념』의 판매대금 479,500원 전액을 기금으로 희사함으로써 전국 회원들의 동참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1972년 12월 말 기준, 57명의 봉사의 인이 장학금을 내 기금 누계가 8백1십만원을 기록했다.

초대 이사장이 소속한 한양로타리클럽에서는 봉사의 인 3호인 김인득(벽산그룹 창업회장) 회원을 필두로 클럽의 제2호 박동규, 3호 박용학(대농그룹 창업회장), 4호 김종희(한화그룹 창업회장), 5호 정원성(경남기업 창업회장), 6호 강중희(동아제약 창업회장) 등 6명의 고액기부자가 나와 기금 조성에 붐을 조성했다.

장학재단은 1973년 첫 번째 장학사업으로 10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50만원 이상을 기부한 한양로타리클럽 6명의 회원 명의로 장학금을 지급하였고, 4명은 클럽 명의로 장학금 각 4만원씩 총 40만원을 지급함으로써 첫 사업을 시작하였다.

 

장학문화재단 초석을 다진 박동규 초대 이사장

 

재단의 첫 번째 숙원사업은 기금 1억원 조성이었다. 1974-75년도에 81명의 봉사의 인이 나오면서 기금은 3,444만원이 되었다. 전주로타리클럽은 11명의 봉사의 인에 이어 회원들이 매월 8,000원씩 기부하여 일반거금 분야 전국 1위가 되었다. 또 새전주로타리클럽의 경우 한 번에 봉사의 인 20명을 기록해 최다 봉사의 인 클럽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회원들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1977년 1월 1억원의 기금 목표를 달성했다. 그해 6월말 기준, 한양로타리클럽이 누적액 12,155,000원을 기부해 전국 1위 클럽이 되었고, 동대구로타리클럽(회원 63명)과 서울 영등포로타리클럽(회원 45명)은 회원 전원이 봉사의 인이 되어 재단 창립 이후 최초의 전회원 봉사의 인 클럽이 되었다.

1억원의 기금 목표를 달성하자 ‘또 하나의 1억원’이란 기치를 내걸고 모금에 나서 그로부터 1년 7개월 후인 1978년 8월, 2억원을 달성했다. 장학기금 2억원 달성에 얽힌 후일담을 소개한다.

그해 하반기 장학금 전달식에서 재단이사와 개인장학기금 기부자 등이 모인 자리에서 박 이사장이 “이제 20만원만 있으면 2억원이 되겠는데…”라고 하자 개인장학기금 출연자로 참석했던 영등포로타리클럽의 김노수(金老洙) 회장이 그 돈을 자신이 채우겠다고 하여 추가 성금을 냄으로써 2억원의 금자탑을 쌓게 되었다.(한국장학문화재단 30년사 참조) 김 회장은 이후로도 기부를 이어갔고, 1993년 자녀들이 고희연을 위해 마련한 3천만원마저 고희연을 생략하고 장학재단에 출연하여 미담의 주인공이 되었다. 나중에 김 회장의 누적 기부액은 1억 5,650만원에 이르렀다.

장학문화재단의 발기인이었던 박동규(1916~1985) 이사장은 초대~3대 이사장을 맡아 12년간 재단의 초석을 다졌다. 1916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해 연세대를 졸업한 박 이사장은 중소기업은행장, 산업은행 총재를 거쳐 재무부장관, 해외건설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1년 한양로타리클럽에 입회하여 1970-71년 375지구 총재를 지냈고 로타리 정신을 구현하는 삶을 살았다. 특히 초창기 장학문화재단의 기반 조성을 위해 헌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이사장은 각 지구의 연차대회(오늘의 지구대회)는 물론 클럽 주회에 방문해 장학사업과 재단 현황을 보고하면서 전국적으로 모금활동에 직접 나섰다.

지난해까지 총 7만여 명에게 1,426억원 지급

 

재단은 창립 10년 만에 10억원의 기금을 넘어서 1983년 6월말 기준 13억 8천만원을 조성했다. 이는 전국 12,300명의 회원들의 뜻이 모여 이룩한 것으로서 우리나라 로타리 역사상 소중한 금자탑이 되었고, 로타리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준 역사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1인당 장학금이 50만원으로 인상되어 248명의 학생에게 1억 1,900만원을 지급하였다.

 

□ 장학기금 및 장학사업 현황

기부금 누계액

총 장학금 지급액

총 장학생 수

1,640억 9,042만원

1,426억 970만원

71,138명

(기준: 2024. 12. 31, 한국로타리장학문화재단)

 

 

박 이사장이 퇴임하고 제4~5대 이사장에 김영휘(金永徽, 1913~2001) 375지구 전 총재(1977-78년)가 선임되었다. 한양로타리 회원으로서 규슈대 법학과와 교토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김 이사장은 1954년 한국산업은행 창설 당시 초대 부총재를 맡았고, 이후 한국산업은행 총재를 거쳐 한국개발연구원(KDI) 이사장 등을 역임한 금융인이다. 또, 1985-87년 RI이사로 활동한 바 있다.

재단은 1988년 총 기금 30억원을 적립했고 1991년 50억원을 돌파, 1994년 100억원, 1998년 200억원, 2001년 300억원 등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지난 연말을 기준으로 기금총액은 약 1,641억원이며, 장학생 연인원은 7만1천여 명, 지급된 장학금은 약 1,427억원에 이른다. (다음호에 계속)

 

1972년 장학문화재단 제1차 이사회.

 

장학문화재단의 초석을 놓은 박동규 초대 이사장.

 

1997년 스코틀랜드 세계대회의 고액기부자 환영만찬에서. 왼쪽부터 오재경 전RI이사, 김노수 회장, 송인상 전RI이사, 김종대 전재단관리위원, 이동건 RI이사, 김태인 장학문화재단 이사장. (출처 한국로타리장학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