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3650 지구소개
Rotary International District 3650
한국로타리, 3650지구 백년 이야기 (9회)
로타리 사상 처음 여성회원 허용한 1989년,
국내선 3730지구 고성해성RC 첫 여성클럽 탄생…
제80회 서울세계대회 개최로 한국 위상 높아져
글. 신흥래/지구사료위원장, 서울새신라RC, 소설가
서울올림픽은 우리 현대사의 주요한 변곡점이었다. 세계 사회가 올림픽을 통해 한국을 새롭게 바라보았다는 점에서도 그러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임과 동시에 세계화에 대한 자신감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도 그 영향력이 컸다. 따라서 우리 현대사는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서울올림픽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그 의미가 남달랐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4년 뒤에 열린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동서갈등으로 반쪽 대회가 되었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르러 화합과 평화의 물꼬를 트게 되었고, 그 결과 159개국 8,391명의 선수가 참가하는 역대 최대규모의 올림픽이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금 12, 은 10, 동 11이라는 올림픽 참가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세계 4위에 올랐다. 우리 선수들이 레슬링과 권투, 유도, 탁구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자 그야말로 연일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흔들리는 낭보에 온 국민이 기뻐했다. 또한, 오늘날에도 세계 정상급 기량을 자랑하는 양궁에서도 금메달 2개를 따는 등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줌으로써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이라는 자긍심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올림픽이었다.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제80회 서울국제대회>
서울올림픽 열기를 이은 1989 서울국제대회
한국로타리는 그 이듬해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올림픽체조경기장 등 올림픽공원에서 제80차 서울국제대회를 개최함으로써 국제로타리에 그 역량과 자존감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다.
국제대회(오늘날 공식명칭은 세계대회)는 1910년 미국에서 처음 열린 이래 오늘날까지 세계 각국을 돌며 개최되고 있는 로타리 최대 행사다. 한국로타리는 1989년에 이어 2016년에도 세계대회를 유치한 바 있다.
1989년 서울대회 즈음 국제로타리 각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RI 서울국제대회위원장 송인상(한양RC, 훗날 1993-95 RI이사, 재정경제부장관⸱한국수출입은행장 역임, 효성그룹 고문), RI회장 지명위원회 위원 김영소 전RI이사(1975~77 RI이사, 부산RC, 춘해외과의원 원장⸱춘해학원 이사장), RI 자문위원회 아시아지역 부위원장 김영휘 RI이사(1985~87 RI이사, 한양RC, 한국산업은행 총재 역임)가 있었고, 엄주택(369지구 전총재, 안양RC, 성심의원 원장), 신응균(365지구 전총재, 남서울RC, 국방부차관⸱독일대사 역임), 김흥한(365지구 전총재, 서울RC, 변호사) 등이 위원으로 활동했다.
RI 한국 재무으로는 조동수(375지구 전총재, 서울RC, 연세대 의료원장⸱대한의사협회장 역임), 폴리오플러스위원회 한국지역위원장 문병기(365지구 전총재, 서울RC, 연세의대 교수, 이화여대 부총장 겸 의료원장⸱한국재활재단 이사장 역임), WCS위원회 아시아지역 위원 방 현(369지구 초대총재, 평택RC, 서울적십자병원 산부인과 과장 역임, 방산부인과의원 원장), 1987 아시아지역대회위원회 위원 남궁윤(368지구 전총재, 청주RC, 남궁병원 원장) 등이 있었다.
서울국제대회는 1989년 5월 21일부터 24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서울올림픽공원에서 열렸고, 전 세계 86개국, 38,878명의 로타리안이 참가했다. 이는 역대 두 번째 규모였고, 한국로타리가 세계 무대로 발돋움하는 기회가 됐다. 당시 우리나라 로타리는 전국 10개 지구에 535개 클럽, 2만2천여 명 규모였다. 이에 앞서 1979년 9월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 아시아지역대회’가 열려 15개국에서 1만여 명이 방한하기도 했다.
서울국제대회의 국내준비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종대(365지구) 김인기(366지구) 신현근(367지구) 문성규(368지구) 이기인(369지구) 여조연(370지구) 박판선(371지구) 김태수(372지구) 김면수(373지구) 한근리(375지구)
김흥한(365지구 전총재) 채희병(365지구 전총재) 오세중(365지구 직전총재) 허종현(366지구 전총재) 고광길(367지구 직전총재) 남궁윤(368지구 전총재) 박상복(369지구 직전총재) 최영내(370지구 전총재) 김기창(371지구 전총재) 김 일(372지구 직전총재) 문창모(373지구 직전총재) 엄주택(375지구 전총재) Horace Underwood(365지구 서울RC 부회장)
<제1차 본회의 및 개회식에서 개회사를 하는 송인상 위원장>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로이스 애비 RI회장>
<서울국제대회의 주역인 송인상 위원장(오른쪽)과 오재경 국내준비위원장>
일본서 1만5천여 명 참가해 성공 견인
국제대회는 로이스 애비(Royce Abbey, 호주) 회장의 연설을 비롯해 섹션별 초청연사들의 강연, 폴리오 플러스 사업 등이 소개되었으며 국제로타리 재무보고와 로타리재단 운영현황, 규정심의회 보고 등이 있었고 주최국의 문화공연을 비롯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
송인상 국제대회위원장은 개회식에서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크고 가장 생산적인 도시로 성장하여 불사조의 모습을 갖춘 서울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라고 환영인사를 했다.
서울대회에서는 우리나라 회원 17,095명에 이어 두 번째로 15,716명이 참가한 일본 로타리안들의 높은 참여율이 대회 성공의 디딤돌이 되었다. 그러나 등록 회원이 국가별로 현저하게 불균형을 보인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서울대회에 100명 이상 참가한 국가로는 미국(2,797), 자유중국(735, 지금의 대만), 필리핀(320), 캐나다(279), 홍콩(231), 호주(195), 멕시코(122), 나이지리아(112) 순이었다.
로이스 애비 RI회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약 50년간 로타리가 존재할 수 없었던 폴란드 바르샤바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로타리클럽을 결성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또, 1988-89년 주요 업적 가운데 소아마비 백신사업(Polio Plus), 컬럼비아 알메로 화산폭발로 파괴된 집을 재건해준 일, 태국 문맹퇴치 운동 등을 소개하고, “로타리의 폴리오 플러스 사업이야말로 모험이었고 새롭게 성숙해진 것이며, 우리들 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눈에도 신뢰를 심어준 일이었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1989년 5월 19~20일, 서울국제대회 식전행사로서 국제로타리가 후원하는 제1차 로타랙트 국제회합이 열렸다. 세계 4대주 15개국에서 약 450명이 참가했고 일본(170명), 한국(70명), 자유중국(30명) 등에서 많은 인원이 참가했다.
이 행사는 국제적 수준에 이른 로타랙트 조직에 봉사의 중대성과 회원증강, 홍보 등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개최되었다. 아울러 국제로타리 회장과 이사진, 로타랙트위원회 위원들이 로타랙트 회원들과 직접 교류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데 의의가 있었으며, 1988년 국제로타리 이사회가 제정한 로타랙트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로타리와 여성 회원, 1989년에야 가입 허용돼
로타리 역사상 1989년은 여성 회원의 입회를 허용하는 정관이 개정된 해였다.
이 안건은 3년마다 열리는 규정심의회에서 몇 차례 정식 의제로 다루어지고 심의된 적이 있었으나 근소한 표차로 부결되어 결실을 맺지 못하다가 1989년 1월 싱가포르 규정심의회에서 비로소 정관개정이 결의되었다. 즉, 이사회는 국제로타리의 모든 정관에서 ‘남성’이라는 단어를 삭제한 개정안을 제출했고 규정심의회에서는 이를 채택했던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참정권은 18세기 말부터 대두되어 20세기 초 각국 헌법에 명문화된 바 있으나 로타리에서의 여성 회원 문제는 로타리 창립 이후 84년 동안 서랍 속에 묻혀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인권에 대한 인식부족, 그리고 종교적⸱문화적 관습으로 인한 남녀차별도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허물어지지 않던 그 장벽을 흔든 것은 캘리포니아주 듀어트(Duarate) 로타리클럽이었다. 이 클럽은 클럽정관에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1978년 3명의 여성 회원을 받아들였다. 이에 국제로타리에서는 클럽 자격을 박탈하기에 이르렀고, 듀어트로타리클럽과 3명의 여성 회원은 법적 소송으로 맞섰다.
1987년 5월 4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7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듀어트로타리와 여성 회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즉, 로타리클럽이 민법상 차별금지 조항의 적용을 받는 비즈니스에 해당한다는 원고측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따라서 국제로타리가 여성들의 가입을 허용했다는 이유로 동 클럽의 회원자격을 박탈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에 국제로타리 이사회는 남녀평등을 명시한 국가에서는 남성만을 회원으로 규정하는 조항을 강제 적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1989년 규정심의회에서 여성의 입회를 허용토록 정관을 개정하였다.
로타리와 여성에 관해서는 여러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로타리와 여성의 역할에 대한 기원은 1910년 전국연합회 결성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이야기들은 다음에 다시 다루기로 한다.
강원도 고성 해성로타리클럽, 국내 첫 여성클럽
<한국 최초 여성클럽인 고성해성로타리클럽.(사진은 2024년 재창립 총회) - 사진제공 구본례>
우리나라는 그해 9월 9일, 373지구(강원도, 현 3730지구) 주문진로타리클럽이 스폰서 클럽이 되어 첫 번째 여성클럽인 고성해성(高城海星)로타리클럽이 창립됐다. 회원은 27명, 초대회장은 이순남이 선임됐다.
하지만 고성해성로타리클럽은 1993년 해체되었다가 구본례 3730지구 신생클럽 어드바이저가 의욕적으로 앞장서 2024년 3월 13일 41명의 회원으로 재창립되었다. 스폰서클럽은 고성로타리클럽이 맡았고, 해체 후 35년 만에 그 명성을 되찾아 활동중에 있다.
현재 한국로타리의 약 6만5천여 명의 회원 중 여성 회원은 약 30%에 이른다. 이는 여성 회원수로서 미국과 인도에서 이어 3위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