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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로타리, 3650지구 100년 이야기 (3)
지구관리자 | 24-10-25 | 조회수 21

한국로타리, 3650지구 100년 이야기 (3)

 

한국로타리 뿌리가 되었던 초창기 로타리안들

1949년 서울로타리로 재건 이후 9개 클럽으로 확대

 

 

글/신흥래/지구사료위원장, 서울새신라RC, 소설가

 

 

문화란 종자와 같다. 종자는 풍요의 밀알이자 미래다. 그래서 농부는 아무리 굶주려도 종자씨를 먹지 않는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라서 역사를 일구는 이들은 밭을 가는 농부처럼 미래를 향해 쉼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한국로타리는 100년 전 심은 씨앗이 오늘을 지어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뿌리를 찾고 더 나은 내일을 잉태할 씨앗을 발견하고 이어주고자 역사를 되짚어가고 있다. 이번은 그 세 번째 이야기다.

 

경성로타리클럽은 출범 후 불과 3년 반 만에 회원수가 두 배를 넘어설 만큼 괄목할 정도로 성장했다. 창립 당시 21명이었던 회원은 1931년 2월 기준으로 43명까지 늘어났다.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당시 43명 이외에도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훗날 일본 30대 수상을 지냄)가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어 있었던 사실이다. 그리고 이름만 걸어두었던 게 아니라 지역대회와 같은 큰 행사에는 그가 참석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명예회원이 된 배경에는 클럽 창립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컸다는 점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첫 회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국내 첫 번째 로타리클럽을 만들려고 했던 이들은 미국 남감리교의 초대 서울 감독으로 와 있던 히람 보아즈(Hiram R. Boaz) 목사를 비롯한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일본 실업인들이 국제로타리 이사였던 요네야마 우메키치, 도쿄로타리클럽과 총독 사이토의 지원을 받아 클럽 창립을 추진함으로써 선교사들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같은 사실은 국제로타리에 보관된 문서를 통해 확인된다.

 

보아즈 목사는 미국 폴리테크닉 칼리지(텍사스여자대학교 전신)와 댈러스 남감리교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는데, 그는 텍사스 시절부터 로타리 회원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 부임한 이후 댈러스로타리클럽의 총무 빌리 허튼(Billy Haughton)을 통해 RI 사무총장 칠리 페리(Cheeley R. Perry)에게 서한을 보내 로타리클럽 창립 절차에 대해 문의했다는 자료가 남아 있어 이러한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1922. 12. 11일자 편지)

 

 

<미국 남감리교에서 파견된 보아즈 목사>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보아즈를 중심으로 한 창립 의도는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그로부터 4년여가 지난 1927년 2월 4일, 도쿄로타리클럽의 마쓰오카 마사오(松岡正男, 당시 경성일보 부사장)가 “한국의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클럽이 결성된다면 그것은 전 직업인을 대변하는 것이 못되는 원맨 클럽(one man club)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다른 실업인들이 이를 원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류, 삼류의 인사로 구성되는 클럽 결성을 원치 않는다. 요네야마(米山梅吉), 이사카(井板孝)는 일류 인사로 구성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라는 취지의 편지를 RI측에 보내 자신들이 주도하는 클럽 창립을 적극 주장했다.(한국로타리 50년사) 즉, 당시 국제로타리 이사로 있던 요네야마 우메키치와 총재특별대표 이사카 타케오(후에 제70지구 총재 역임)의 영향력을 업고 주한 일본 실업인을 주축으로 한 클럽 창립을 주장했고 이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1930년대 중반 활동한 우리 회원들의 면면

 

경성로타리는 창립 7년 만인 1934년 8월 회원수가 52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 가운데는 7명의 우리나라 회원이 새로 가입해 창립회원 4명을 포함, 약 11명이 활동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창립 당시의 한상룡(조선화재보험 사장), 김용주(영자신문 서울프레스 주필), 백상규(보성전문 교수), 김성수(경성방직, 동아일보 사장) 이외에 1930년대 초·중반 김연수, 박영철, 방태영, 민대식이 입회했고, 여기에 유억겸, 박흥식이 활동했다는 전언이 있고, 또 ‘S. Ryu’라는 영문 이름의 회원 기록이 있는데 그의 한국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한국로타리 50년사)

 

초창기 회원들은 거의 1세기 전에 활동한 인물들이므로 그들이 누구였는지 알아본다. 창립회원들에 대해서는 지난 호에서 다루었기에 이번에는 추가 입회한 회원들을 간략히 소개한다.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은 일제강점기 관료 출신으로 조선상업은행장 등을 지낸 경제인이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 세이죠(成城)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2년 전역했다. 이후 강원도지사(1924)와 함북도지사(1926)를 지내다 삼남은행장, 동양척식회사 감사 등을 지냈고 작고 시까지 조선상업은행장으로 재임했다.

 

민대식(閔大植, 1882~1952)은 휘문의숙(지금의 휘문학원) 설립자 민영휘의 둘째아들로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를 졸업했다. 1931년 동일은행장, 1943년엔 한성은행과 합병해 출범한 조흥은행장을 지냈다.

 

그의 동생 민규식(閔奎植, 1898~ ? ) 역시 경성로타리가 해체되던 1940년 당시 동일은행장으로서 클럽 이사를 맡고 있었는데, 그의 정확한 입회년도는 알 수 없다. 추정컨대, 1930년대 후반 김성수와 김연수, 민대식과 민규식은 형제 회원으로서 함께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태영(方台榮, 1885~ ? )은 서울의 사립 철도학교를 나와 경무청에 재직하다 1919년 매일신보의 발행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32년 조선방송협회 이사, 1936년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1939년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한국조폐공사 전신) 창립 당시 이사로 선임되었고 1944년에 회장을 역임했다.

 

유억겸(兪億兼, 1896~1947)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견문록 《서유견문》의 저자인 유길준의 둘째아들로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고, 연희전문(연세대학교 전신) 교수와 부교장 등을 지낸 교육자다.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바 있으나 1938년 흥업구락부(기독교 및 기호파 계열의 항일 비밀결사체)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일제의 강요에 의해 전체 구속 회원들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내고 3개월 만에 출옥했다. 이후 연희전문 교수직을 사임하고 변호사로서 활동했다. 광복 후 미군정청의 문교부장(지금의 교육부장관)을 지냈고 1947년 조선체육회장에 추대됐다.

 

 

<유억겸 당시 연희전문 교수.(출처 한국학연구원)>

 

김연수(金秊洙, 1896~1979)는 경성로타리 창립회원인 김성수의 동생으로 삼양사(지금의 삼양그룹) 사장 등을 지낸 경제인이다.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고 경성방직 상무, 고무신 등 고무제품을 만드는 중앙상공주식회사의 이사와 사장 등을 역임했다. 해동은행 전무와 은행장을 거쳐 1934년 삼양사 사장에 취임했고, 1935년 경성방직 2대 사장을 맡았다. 광복 후 한국경제인협의회(전경련 전신) 초대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김연수 당시 경성방직 사장.(출처 김연수 전기)>

 

박흥식(朴興植, 1903~1994)은 평남 용강 생으로 종로 네거리의 화신백화점 창업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부친(박제현)은 서북학회 회원이었고 진명일어학교와 보신학교 경영에 참여했다. 또, 11살 위의 형(박창식)은 평양 대성학교 졸업 후 독립운동에 투신, 투옥되었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1911년 작고하였다.

 

<박흥식 당시 화신백화점 사장.(출처 한국학대백과).>

 

본래 선일지물을 운영하던 박흥식은 1931년 신태화가 설립한 화신상회를 사들이고 1932년 인근 동아백화점을 인수 합병하여 화신백화점을 열었다. 이후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자 1937년에 지하1층, 지상6층의 신축건물을 지어 백화점을 다시 열었는데, 백화점 내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있었을 만큼 최신 설비를 갖추어 경향각지에서 이를 구경하려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광복 후 화신산업, 흥한화학섬유 사장과 광신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사진 중앙에 서 있는 이가 최순주 조선은행 총재. 사진은 1950년 첫 금융통화위원회의 기록화다.(출처 한국은행)>

 

서튼 국제로타리 회장 등 한국을 찾은 로타리안들

 

국내 하나뿐인 경성로타리클럽에는 국제로타리 회장 등 주요 임원들의 방문이 있었다. 창립 이듬해인 1928년 1월 21일, 국제로타리 회장 서튼(I. B. Sutton) 이 부인과 영애와 함께 방한, 경성로타리클럽을 방문했다.

 

또 1931년 2월 23일, 국제로타리 창립 26주년 기념행사가 경성은행집회소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캐나다의 제임스 데이빗슨(James W. Davidson) 커미셔너가 부인과 영애와 함께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3년간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국제로타리 신장을 위해 헌신했다. 이 기간 중 로타리 가입 국가가 45개국에서 70개국으로 늘어났고, 데이빗슨은 여행 중 인도에서 7개 클럽, 말레이시아에서 5개 클럽을 창립한 것으로 나와 있다.(한국로타리 50년사)

 

참고로, 1930년대 후반 로타리 행사장으로 사용되던 경성은행집회소는 오늘날전국은행연합회 전신으로서 경성부 북미창정(北米倉町, 지금의 북창동)에 있었다. 아마도 회원 가운데 은행인이 많았던 관계로 은행집회소를 자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성은행집회소는 1928년 은행들이 설립한 사단법인체로서 1948년 명칭이 서울은행집회소로 변경되었다가 1975년 서울은행협회로 개편되었고, 1984년 현재와 같은 사단법인 전국은행연합회로 이어져오고 있다.

 

 

한국로타리 재건과 9개 클럽 연합회 시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3월 29일 서울로타리클럽이 재창립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국로타리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재건 창립회원은 25명, 초대회장에는 최순주(崔淳周)가 추대되었다.

 

당시 초대회장 최순주(1902~1956)는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 총재였다. 충북 영동 출신인 그는 일제강점기에 연희전문과 뉴욕대 상학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 교수로 재직하던 중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풀려난 뒤 대학을 떠났다. 1950~51년 재무부장관을 지냈고, 1954년 고향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나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회의의 사회를 보았다는 비판으로 1954년 부의장직을 사퇴했다. 그는 국회의원 임기 중 지병으로 작고했다.

 

부산로타리클럽 역시 1940년 12월 31일 해체되었다가 1951년 11월 15일 초대회장 양성봉(梁聖奉, 당시 경남도지사) 등 39명의 회원으로 재건되었다.(한국로타리 50년사)

 

초대회장 양성봉(1900~1963)은 미 군정하에서 초대 부산부윤(지금의 부산시장)을 지냈고, 강원도지사와 경남도지사를 거쳐 1953년 농림부장관을 역임한 바 있다.

 

아울러 1938년 창립된 대구로타리클럽은 1954년 6월 8일 다시 재승인되어 초대회장 신현돈(申鉉敦, 당시 경북도지사) 등 37명의 회원이 활동했다.

 

초대회장 신현돈(1903~1965)은 경북 예안군(현 안동시)에서 출생,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내과의사로서 경성의대부속병원 등에서 근무하다 전북 무주군에 지남의원을 개원해 벽지에서 의술을 베풀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무주군)에 당선되었고, 이후 초대 전북도지와 3대 경북도지사를 지냈다. 제2공화국 장면 정부에서는 보건사회부장관과 무임소장관, 내무부장관 등을 역임했으나 뇌일혈로 갑자기 작고했다.

 

이로써 일제강점기에 출범한 로타리클럽 중 평양로타리클럽을 제외한 경성, 부산, 대구 등 3개 클럽이 국제로타리의 재승인을 거쳐 새로이 출발했고, 이어서 6.25 한국전쟁 이후 1959년까지 9개 클럽이 새로 창립되었다.

 

<부민관에서 열린 지역대회 광경.(조선일보 1938. 5. 16)>

 

서울로타리클럽에서 분리된 한양로타리클럽이 21명의 회원으로 1955년 9월 1일 창립되어 이듬해 RI의 승인을 받았다. 초대회장 윤호병(尹皥炳, 1891~1975)은 미군정청 재무부장을 지내고 조선은행 총재, 한국상업은행장, 서울은행장을 거쳐 허정 내각에서 제10대 재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경성전기 대표이사와 제2대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한국전쟁 이후 새로 창립된 클럽 들에 대하여 알아본다.

 

1957년에는 인천(초대회장 최승만, 회원 14명), 남서울(초대회장 임일식, 회원 33명), 대전(초대회장 문갑동, 회원 42명), 전주(초대회장 김두헌, 회원 19명) 로타리클럽 등 4개 클럽이 창립되었고, 이로써 전국에 총 9개 클럽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국내 9개 클럽이 1959년 2월 23일 서울 반도호텔에서 한국로타리연합회 창립총회를 가짐으로써 연합회 시대를 열게 되었고, 초대 연합회장에 서울로타리클럽 소속 김동성(金東成, 연합통신사 회장)을 선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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